트랜스 휴머니즘은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할 수 있기에 우리는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간 능력이나 특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대표적 트랜스 휴머니스트라고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는 보스 트롬은 트랜스 휴머니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응용 이송 특히 기술을 사용하여 노화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적 육체적 심리적 능력을 향상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확대함으로써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향상하게 시킬 가능성과 그 바람직함을 긍정적으로 그 바람직함을 긍정하는 지적 문화적 운동이 바로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트랜스 휴머니즘은 세계 트랜스 휴머니스트 협회가 공표한 트랜스 휴머니스트 선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트랜스 휴머니스트 선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미래에 과학과 기술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예견하건대 여러 가지 인간의 상태를 재설계하는 일이 현실화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상태란 노화의 불가피성 인간의 지적 능력에서의 제약들 인간이 선택하지 않은 인간 정신의 특성 고통 지구라는 행성에 갇혀 있다고 하는 제약 등을 포함한다. 우리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이 본 건데 이 신생 기술을 금지하기보다는 그 기술에 대해 널리 개방하고 끌어안는다면 그 기술을 우리에게 이렇게 바꿀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써서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능력을 넓히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기를 바라는 이들이 갖는 도덕적 권리를 옹호한다. 우리는 현재의 생물학적 제약을 넘어서서 인간 개인의 성장을 추구한다. 이처럼 트랜스 휴머니즘은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서 출발합니다.
기술적인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고 불릴 만큼 기술적인 수단을 통해 지금보다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보유한 존재를 꿈꾸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의해야 할 것은 포스트 휴머니즘과 트랜스 휴머니즘의 구분입니다. 한마디로 포스트 휴머니즘과 트랜스 휴머니즘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휴머니즘을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한 분파가 바로 트랜스 휴머니즘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휴머니즘 이후에 등장한 생각이나 이념 특히 휴머니즘의 주장이나 생각을 극복하거나 넘어서려는 사상이나 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포괄적인 측면에서 휴머니즘과 포스트 휴머니즘의 결정적인 차이가 어떤 것인지 잠깐 보겠습니다. 우선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입니다. 휴머니즘이 대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인간 본성은 확정적이고 불변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 본성이 과학 기술에 의해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휴머니즘은 인간 조건의 불변성을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 조건의 가변성을 주장하는 것이죠. 다음으로는 휴머니즘이 인간의 사멸 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의 불멸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다릅니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이 죽음을 문화적으로 극복했다고 한다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이 죽음을 기술적으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문화적 극복이라는 말은 무슨 표현일까요? 이건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영어 단어 컨세션이라는 단어 알고 계시는가요 영어 단어 컨세션의 첫 번째 뜻은 생각 착상 파괴라는 뜻도 있지만 임신 수태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컨세션은 영혼의 자식을 품는다는 의미와 육체의 자식을 품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지만 그런데도 불멸의 존재로 남는 방식을 머릿속으로 구상합니다. 바로 문화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이죠.
불멸의 존재로 남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명예로운 자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과 실제 자손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자식을 남기는 것과 실제 자식을 육체의 자식을 남기는 것 이렇게 구분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바로 후대 사람들이 기억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큼 탁월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화적인 극복이라는 거죠. 어쨌든 휴머니즘은 죽음을 문화적으로 극복했다고 한다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죽음을 기술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첨단 과학 기술을 통해 인간을 트랜스 휴먼 혹은 포스트 휴먼으로 향상하고자 하는 시도는 상당한 쟁점을 낳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인간다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첨단 과학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인간 향상 기술의 혜택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보통 사람과 기술에 의해 향상된 인간의 어떤 이런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한 쟁점들이죠. 인간 향상에 대한 비판 가운데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판은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선물 논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죠.
더 깊숙한 위험은 유전 공학이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서 자연을 우리의 목적에 봉사하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내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열망 즉 인간의 과도한 행위 주체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주어진 선물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첫째 우리의 재능이나 능력이 행위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전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능력을 개발하거나 그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둘째,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욕구나 처리하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점이다.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프로메테우스적인 충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고 진정한 겸손을 배울 것이다. 샌델의 언급에는 인간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존엄한 존재라는 강한 존재가 깔려 있습니다. 특히 생명공학적인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성이나 정복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욕망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완전성이나 정복에 대한 욕망을 지속해서 추구한다면 인간의 주어진 삶을 선물로써 받아들이는 그런 감사의 태도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노력하여 성취할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미래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잃기 쉽더라는 그런 우려가 바로 샌들의 선물 논변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 향상을 추구한 결과 우리는 인간 고유의 어떤 그런 덕성과 태도와 성품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눈여겨볼 또 하나의 비판은 스티브 잡스의 비판입니다. 혁신 기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집약시키고자 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을 좋아했던 그런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인간 사멸 성에 토대를 둔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죽음은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바로 죽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라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목소리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진정한 마음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깊은 성찰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점을 스티브 잡스는 죽음에 대한 언급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휴먼의 시대가 앞으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는 정말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포스트 휴먼 시대의 도래에 앞서서 인간 본성과 인간 가치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서서 과학 기술이 과연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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